건강가정, 가족에 대한 신학적 고찰

-신약 성경에 나타난 가족의 가치와 규례 / 강대훈 교수( 개신대학원대학교)

2021-07-06 01:14:41  인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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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가정, 가족에 대한 신학적 고찰

- 신약 성경에 나타난 가족의 가치와 규례 -]

 

강 대 훈 교수

(개신대학원대학교)

 

<목 차>---------------------------------------------------------

I. 들어가는 말

II. 가족에 대한 예수의 관심

III. 남편과 아내

1. 하나 됨

2. 상호 존중과 상호 헌신

IV. 부모와 자녀

 

1. 자녀의 의무

2. 부모(또는 어른들)의 의무

V. 형제애

1. 고대 유대와 그리스-로마 문헌에 나타난 형제애

2. 형제애와 교회

VI.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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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본 논문은 신약에 나타난 가족의 가치와 규례(또는 윤리)를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신약에서 이상적인 가정의 예를 찾는 작업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복음서와 서신서는 모범적인 가정을 열거하는 것보다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기 때문이며,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과 윤리를 위해 가족의 언어를 다양하게 활용하지만(, ‘아버지’, ‘형제 자매’, ‘자녀; 5:21-6:9; 3:18-4:1; 벧전 2:13-3:7) 실제 가정을 모본으로 제시한 예는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에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태도와 성품, 곧 가정의 이상적인 규례가 제시된다. 우리는 가정의 규례가 담긴 본문들을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범적인 가정의 모습을 재구성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가족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치유사건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가족 구성원의 윤리를 위한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과 권면을 검토할 것이다. 이런 자료와 신약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통해 우리는 신약 저자들이 강조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또는 성경적인 가족의 모습과 규례를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작업은 신약이 기록된 시기 사람들의 가족에 대한 이해가 어떠했는지 조사해야 하고 당시 그리스-로마와 유대 문헌의 기록을 통해 가능하다.현대적 적용을 위해 1세기 가족 구성원 중에서 에 대한 규례는 제외할 것이다.

 

 

II. 가족에 대한 예수의 관심

 

얼핏 보기에 복음서의 예수는 제자가 되기 위해 가족을 미워하고 버려야만 하는 것 같다(, 9:57-62; 14:26). 심지어 예수께서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도 냉정한 모습을 보인 것처럼 묘사된다(참고. 3:33-35; 12:46-50; 2:49; 8:20).다시 말해서, 가족에 대한 예수의 관점이 부정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과연 예수는 혈육의 가족보다 그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영적인 가족을 더 중요하게 여기실까?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가치관이 충돌하면서 가족이 하나님 나라의 길을 가는 구성원을 핍박하는 것은 예수께서 예고하신 사실이고 신약뿐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는 현실이다. 급진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기존의 질서가 충돌하고 충돌하게 될 상황에서 절대적 가치인 예수를 따르는 것에 비해 가족은 이차적인 가치가 된다(, 14:26). 이런 원리는 제자 자신의 목숨에도 적용된다(, 14:27). 예수에 대해 상대적 가치를 지닌다고 해서 예수께서 가족을 복음 사역을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거나 낮은 가치로 여기신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사실은 마태복음 8-10장이나 누가복음 8-9장과 같이 제자 공동체를 구성하고 제자들을 훈육하는 단락에서도 가족의 회복에 관심을 두시는 예수의 시선을 통해 입증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모든 것을 급진적으로 버리고 자신을 따라야 함을 강조하는 문맥에서 가족의 공통에 깊이 참여하고 치유와 소생으로 가족에게 기쁨을 선물하신다. 공관복음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몇 가지 본문에서 가족에 대한 예수의 행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인성 과부의 아이가 살아난 사건(7:11-17)을 제외하면,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 혈루증을 앓던 여자, 귀신들린 아이의 치유, 열두 살 소녀가 살아난 사건은 공관복음에 기록된다. 누가복음 8-9장은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사건들을 담고 있다. 이 단락에서 가족의 회복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 8:26-39은 예수께서 거라사 지역의 군대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한 사건이다. 동네 사람들은 귀신들에서 해방된 남자가 옷을 입고 온전한 정신으로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두려워한다(35). 발 앞에 앉는 또는 발 앞에 앉는 것은 제자가 되고 교육을 받는 모습을 의미한다. 이 모습은 학생과 제자가 선생에게 배우는 자세다(참고. 10:39; 왕하 4:38; 22:3). 예수에게서 배우는 신분으로 변화된 거라사 사람은 예수와 함께 배를 타고 가기를 원한다(38). 하지만 예수는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신다(39; 참고. 9:59-60; 14:26; 18:28).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 가족에게 전해야 한다. 가정에 돌아가는 것이 예수의 은혜를 갚은 제자의 길이다. 예수는 귀신들린 자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은 가족에게 회복된 자를 선물로 돌려주신다. 열두 제자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다니는 것만 제자의 길이 아니다.

예수는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자를 치유하신다(8:43-48). 예수는 치유 받은 여자를 로 부르신다. 그녀를 확대 가족인 동네의 공동체로 회복시켜 주신다. 예수는 여자가 공동체로 회복된 사실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기 위해 그녀를 중앙에 세우셨다(47). “평안히 가라”(48)는 일상의 인사다(참고. 16:36; 삼상 1:17; 20:42; 29:7). 평안(평화)은 천사들이 예수를 통해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한 선물이다(1:79; 2:14; 7:50; 24:36). 여태껏 여자는 이런 인사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사회의 누구도 그녀를 부정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공동체와 가족으로 돌아가 평안의 인생을 살 수 있다.

예수는 열두 살 소녀를 살리신다(8:49-56). 예수는 소녀의 집에 들어가 울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신다(52). 예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야 일어나라고 명령하신다(54). 예수의 능력으로 아이의 영이 돌아와 아이가 일어났다(55). 예수는 살아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지시한다. 독자는 부모를 지칭하는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가는 56절에서 부모”(γονες 게네이스)로 표현하지만 51절에서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τν πατρα τς παιδς κατν μητρα, 톤 파테라 테스 파이도스 카이 톤 메테라, 개역개정-“아이의 부모”), 어머니를 언급한다. 식사는 가족 공동체의 유대감을 표현하는 자리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 중에 먹을 것은 누가 주었겠는가? 어머니였을 것이다. 아이의 어머니는 딸이 잠을 자고 일어나 밥을 먹는 장면을 보고 있다. 잠시 앓다가 일어난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어머니의 행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격이다. 이처럼 예수는 딸을 살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돌려주셨다. 이 사건은 유일한 아들을 살리신 사건과 비슷하다(7:11-17). 나인성의 죽은 자는 청년이었고 어머니의 독자였다(12). “유일한 아들”(μονογενς 모노게네스)은 유일한 자녀(7:12; 8:42; 9:38)를 가리킨다. 어머니는 과부였다. 어머니의 유일한 가족이 죽었다. 성경은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을 겪는 사람을 독자를 잃은 여자로 표현한다(6:26; 8:10; 12:10). 예수는 여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13). 누가는 11-15절에서 인칭대명사 그녀를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시선을 여자에게 맞춘다.예수는 여자에게 울지 말라고 명령하고 아들을 살린다(15). 예수는 이제 아들을 어머니에게 주신다. 무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고백하며 기뻐한다. “방문하다”(개역개정 돌아보다”)는 사가랴의 찬송에 등장한 용어로 하나님의 방문은 구원으로 나타난다(1:68-69). 나인성의 청년이 살아난 사건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방문하실 것이라는 기대가 성취된 사건이다(참고. 3:16; 4:31). 이 사건에서 누가는 예수께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고 그녀가 아들을 돌려받는 장면을 강조한다. 간단히 말해 이 사건은 가족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예수의 마음과 의도를 잘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누가복음 8:37-50은 예수께서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아이를 살리신 사건이다. 무리 중에서 한 남자가 예수에게 절박한 심정으로 아들을 쳐다 봐 주시길 간청한다(38). 남자는 말한다. “내게는 독자입니다!” “독자유일한 자녀”(μονογενς 모노게네스)를 가리킨다. 독생자의 장례 행렬에 있었던 나인의 어머니처럼(7:12) 아이의 아버지는 비통한 마음으로 예수의 도움을 간청한다. 예수는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아이를 치유하시고 아버지에게 돌려주신다(42b). 예수는 나인의 과부에게 아들을 살려서 돌려주셨다(7:15). 아버지는 잃어버린 소중한 존재를 돌려받았다. 이 장면에도 예수의 능력과 권위가 가정의 회복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복음서는 이상적인 또는 모범적인 가족을 제시하기 보다는 예수를 통해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가족의 언어로 묘사하는 데 관심을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예수의 관심을 치유와 소생의 장면을 중심으로 묘사한다. 특히 예수는 가족 구성원의 고통에 참여하시고 고통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가족을 위로하신다. 자녀를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돌려주시는 장면은 예수께서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는 가정을 회복시키는 나라인 것을 내포한다.

 

 

III. 남편과 아내

 

남편과 아내는 가족을 확장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점에서 가족의 핵심 구성원들이다.신약은 구약과 마찬가지로 결혼을 소중한 규범으로 전제하므로 결혼한 남편과 아내의 연합과 상호 헌신을 건강한 결혼의 중요한 요소로 가르친다.

 

1. 하나 됨

 

복음서에는 결혼한 부부에 대한 예수의 의견이 나타난다(, 5:31-32; 19:3-12; 10:2-12; 16:18; 참고. 고전 7:10-16). 마태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1을 근거로 이혼에 대해 질문했으나(19:3) 예수는 창세기 1:11:27을 사용해 창조주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결혼 제도를 시작하신 사실을 언급하신다(4-6). 예수는 창세기 2:24을 인용해 부부의 연합을 강조한다(19:5; 10:9; 참고. 고전 6:16; 5:31). 결혼의 본질은 남자와 여자의 하나 됨, 곧 연합이다. 결혼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육체를 이루는 것이다(5). 부모를 떠나는 목적은 부부의 연합이다.인간이 주도적으로 한 몸을 분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나 뜻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남편과 아내 외의 상대와 성관계를 맺는 것은 연합을 깨고 한 몸을 죽이는 행위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19:4)에서 본래는 하나님이 결혼 제도를 시작하신 때, 사람이 완악하게 되기 전을 가리킨다. 신명기 24:1의 이혼 규례는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주어졌다.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이혼을 명령했다고 표현했으나(3) 예수는 허락한 것이라고 설명하신다(8).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이유는 너희의 완악함때문이지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아니었다(8). 인간의 마음이 완악해지기 전에는 이혼이 허락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이혼은 명령이 아니라 인간을 배려한 하나님의 허락이다. 예수의 제자는 마음이 완악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시작된 하늘나라의 새 백성이며 소금과 빛이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평생 동안 한 배우자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2. 상호 존중과 상호 헌신

 

신약의 서신서는 남편과 아내의 태도를 기록한다(고전 7:3-5; 5:22-25; 3:18-19; 벧전 3:1-7). 바울과 베드로가 부부 생활의 원리를 어떻게 권면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고린도전서 7:3-5

 

고린도전서 7:1-7은 결혼과 부부 생활의 친밀함을 주제로 다룬다. 남편과 아내는 등등한 위치에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 3절에서 말하는 의무(ὀφειλ오페일레)는 문자적으로는 갚아야 하는 돈으로 본문에서는 결혼한 부부가 지켜야 하는 성관계의 의무를 말한다.바울은 배우자의 몸이 상대 배우자에게 속해 있다고 말함으로써 성관계가 결혼의 제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4; 참고. 20:5-7; 28:30). 4절에서 바울은 권한을 가진다’(ἐξουσιζω 엑수시아조)는 동사를 남편과 아내에게 똑같이 사용한다. 이 동사는 누군가 또는 어떤 것에 대한 권한이나 권세를 가진다는 뜻이다.결혼으로 배우자는 상대 배우자의 권한 아래 들어가게 된다. 남편은 아내의 권한 안에 있고 아내는 남편의 권한에 있다. 이는 상대 배우자의 몸을 주관할 권한이 자신에게 주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당신이 내게 갚을 의무가 있습니다가 아니라 내가 당신에게 갚을 의무가 있습니다를 강조한다.배우자의 몸에 대한 권한이 상대 배우자게 있다는 사실은 부부가 결혼으로 한 육체라는 된다는 원리에 근거한다(고전 6:16; 2:24). 아내의 경우처럼 남편도 자신의 몸에 대한 권한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남편의 성적 주도권과 자유가 아내에 의해 제한된다.다시 말해서, 남편의 몸은 아내의 권한이므로 다른 여자와 성관계를 맺을 수 없고 아내의 성적 만족과 기쁨을 채워줄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불륜은 다른 사람의 배우자를 빼앗는 절도에 해당한다(20:14-15, 17; 31:9-10).

기도를 위한 목적 외에 배우자와 성관계를 의도적으로 일방적이고 장기간 거부할 경우 사탄의 시험에 빠질 수 있다(5; 참고. 19:15; 15:18; 삼상 21:4-6). 성관계를 잠시 중단하는 경건의 시간도 부부의 합의를 거쳐야 한다. 그만큼 남편과 아내는 상대방의 성적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남편이 시험에 빠지는 것은 음행과 관련이 있다.상대 배우자가 성 관계를 원하는데도 불구하고 배우자가 성관계를 합의 없이 장시간 거부하는 경우 사탄이 성적 욕구를 절제하기 힘들어하는 상대 배우자를 시험에 빠뜨릴 수 있다. 서로 합의 하에 배우자가 기도 시간을 가진다고 해도 그런 기도 시간마저도 성관계를 절제할 수 있는 한계를 무너뜨리고 상대 배우자가 음행의 유혹에 넘어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여기서 바울은 목회자의 마음으로 권면한다.그는 성도들의 연약함을 알고 실제로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물론 본문은 서로의 인격적인 신뢰성이 없는 상황에서 성관계를 요구하고 불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리게 하는 근거는 아니다. 바울이 남편과 아내가 평등한 것으로 규정하고 상호 헌신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의 권면은 아내에게 성관계를 요구하는 압박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바울은 경건 생활에도 서로의 논의와 합의가 있어야 할 정도로 부부의 하나 됨에 있어 성관계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달리 말하자면 바울은 부부 관계의 상호 존중과 상호 동의(또는 합의)를 권면한다.

 

(2) 에베소서 5:22-33(참고. 3:18-19)

 

에베소서 5:22-33, 골로새서 3:18-19은 대표적인 가정과 결혼의 규례를 담고 있다(참고. 2:4-5). 바울은 가정 규례를 시작하기 전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는 원리를 선언한다. 바울은 서로복종할 것을 언급함으로 쌍방의 책임과 헌신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한다. 21절의 복종하라18절의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πληροσθε 플레루스테)에 연결되는 분사로 상호 복종은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요구되는 태도다. 24-25절에서 바울은 상호 복종의 원리를 부부의 관계에 적용한다(참고. 고전 6:7). 말하자면, 부부의 규례는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상호 복종하라는 명령에 포함된다. 상호 복종과 상호 헌신을 위한 지침은 주께 하듯 하라”(아내), “그리스도에게 하듯”(아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남편)로 표현된다. 이는 남편과 아내가 종으로 상대방을 섬길 때 연합의 신비가 실현되는 것임을 의미한다(참고. 고전 16:16; 살전 5:12-13). 특히 바울은 사랑하다’(ἀγαπω 아가파오) 동사로 아내를 위한 남편의 사랑과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비교함으로써 아내를 위한 사랑이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표현됐다. 남편의 사랑은 아내를 위한 희생으로 표현되는 것이어야 한다.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먼저 사랑(희생)하신 것처럼 남편의 희생이 아내의 존경보다 앞서야 한다.이처럼 아내와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둘 때 부부의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5:22, 25; 3:18).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죽으셨고(10:45), 자기를 비워 십자가에 죽기까지 종으로 순종하셨다(2:3-8). 그리스도의 헌신을 실천하는 삶이 부부의 친밀함을 위한 원리다.

또한 바울은 31절에서 창세기 2:24을 인용함으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할 근거를 부부가 한 육체라는 사실에 둔다(참고. 19:5; 고전 6:16). 부부가 한 육체가 된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가 연합된 몸을 이루는 것과 같은 이치다(32). 바울은 사랑과 존중의 권면을 배우자가 어떤 조건에 합당한 행동을 하는 경우로 제한하지 않는다.예를 들어, 아내가 남편을 존중하는 조건이 이루어질 때 남편도 아내를 사랑하라는 의미가 아니다.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선행 때문이 아니라 한 몸이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남편은 아내가 헌신을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룬 지체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31a). 아내 역시 남편의 선행 때문이 아니라 남편이 한 몸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한다.

 

(3) 베드로전서 3:1-7

 

베드로는 기독교인들이 극소수인 사회에서 신자인 아내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3:1-6),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7) 권면한다.본문은 이교 문화에서 다른 종교로 살아가는 남편과 아내를 위한 권면을 담고 있으므로 본문을 적절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와 고대 유대 문화의 가정 질서와 여성의 위치가 어떤 관계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그리스-로마 문화와 유대 문화의 여성상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아내, 자녀, , 집의 구성원 전부에 대한 권위는 가장인 남편에게 있었다.세네카는 남편이 아내를 어떻게 대하고 아버지가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고 주인이 종들을 어떻게 다스리는지를 가정 관리의 기본으로 생각했다(3:18-4:1).아내는 결혼 이후 남편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남편이 숭배하는 신들을 섬겨야 했다. 그리스-로마 사회는 가정 종교의 일체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가장의 종교를 중심으로 번영과 안정을 추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가장을 중심으로 모든 가족 구성원은 매일, 매월의 종교 행위나 정기적인 제사에 함께 참여했다.플루타르크는 가족 종교에서 일치와 연합을 위해 신부는 기존에 섬기던 신들이 아니라 남편의 신들을 경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Plutarch, Conj. praec. 19 (Moralia140d).이런 문화에서 아내가 남편과 다른 종교를 수용하고 남편이 섬기는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추구하는 가정의 이상을 침해하는 행위였다.

 

가족의 종교는 남자들을 통해 전수되며, 가장은 대제사장이었다. 결혼으로 소녀는 자기 아버지의 종교를 버리고 남편의 가정에서 숭배했다.”(Plutarch, Advice§19)

 

여자는 자신의 친구들을 사귀지 말아야 하고 남편과 마찬가지로 그의 친구들로 만족해야 한다. 신들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친구들이다. 그러므로 아내는 그녀의 남편이 믿는 신들만 숭배하고 알아야 하고 낯설고 이상한 미신들에 대해 문을 굳게 닫아야 한다. (19 [Moralia 140d])

 

고대 유대 문헌과 그리스-로마 문헌은 여성의 내적인 덕을 강조한다. 구약 위경인 <에녹1> 8장에서 타락한 천사 아자젤은 사람들에게 칼, 방패와 같은 도구뿐 아니라 화장품이나 눈꺼풀을 꾸미는 장치, 보석 등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쳤다. 이 본문은 여자들이 화장하고 외모를 꾸미는 행위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르우벤의 유언> 5장은 여성을 남자를 유혹할 위험을 지닌 존재로 묘사한다. 여자들은 남자를 다스릴 권위와 권세를 갖고 있지 않아서 외모를 수단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전술을 세운다(5:1-2). 저자는 난잡한 홍수 심판을 초래한 파수꾼들의 타락도 여자들의 유혹 때문인 것으로 평가한다(5:6). 남자를 유혹하는 잠재적 원인으로 전제하고 외모가 아니라 내면을 단장할 것을 강조한다.

 

참으로 주의 천사가 내게 말했고 알려주었다.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난잡함의 영에 더 쉽게 사로잡힌다. 여자들은 남자들을 공격하려고 마음으로 획책하고, 자신들을 꾸밈으로 남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만들고, 외모로 독약을 주입하고, 결국 그런 식의 행위로 남자들을 속박시켜 버린다.그러므로 나의 자녀들아 성적인 난잡함을 피하라. 너희의 아내들과 너희의 딸들에게 남자들의 건전한 마음을 기만할 목적으로 그들의 머리와 얼굴을 단장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라. (<르우벤의 유언> 5:3-5)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도 값비싼 옷이나 보석으로 치장하는 여성보다 적합한 복장을 갖추는 여성을 더 존중했다.예를 들어, 크세노폰은 가정주부는 외모의 단장이 아니라 덕스러운 행위로 세상에서 선과 미를 증가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Xenophon, Oeconomicus7.43; 참고. Aristotle, Oeconomica3.1).세네카는 유배 중에 어머니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에서 검소하게 생활한 어머니를 칭송했다.

 

보석이나 진주가 당신의 눈을 사로잡지 못했습니다.당신은 색소와 화장품으로 얼굴을 오염시키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속을 드러내는 종류의 옷에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겸손이 당신의 유일한 단장으로 보입니다. 이는 최고의 꾸밈, 가장 아름다운 것, 모든 세대에 알맞은 미입니다. (Seneca, Ad Helviam16.3-5).

 

2) 남편과 아내를 위한 베드로전서 3:1-7의 권면

 

베드로는 1-6절에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태도를 권면한 내용이다. 베드로는 남편에 대한 순종을 안내에게 권면한다. “마찬가지로 아내들이여 여러분의 남편들에게 순종하십시오. 이는 어떤 이들이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을지라도 아내들의 행실로 말없이도 얻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1, 사역). “마찬가지로”(ὁμοως 호모이오스)7절에도 사용되는 부사로 2:17의 내용을 연결한다. “모두를 존중하십시오. 형제들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왕을 존중하십시오”(2:17, 사역). 다시 말해서, 아내를 위한 권면(1-6)은 형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명령에 해당한다. 한편, 본문의 순종은 기독교 신앙으로 남편을 인도하는 수단이지만(, 고전 7:13, 16)아내가 남편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가 7절에서 언급하는 전제처럼 결혼한 부부의 평등은 예수의 가르침(19:4-6)과 초기 기독교 전통(고전 11:11-12; 3:28)에 근거한다. 1절에서 언급한 남편들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ἀπειθοσιν τλόγ아페이투신 토 로고) 사람들, 즉 하나님과 예수를 믿지 않는다. 여기서 말씀”(ὁ λόγος 호 로고스)은 기독교 신앙(믿음)을 가리킨다.남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 반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 아내는 비기독교인 남편을 어떻게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는가? 남편은 말없이”(ἄνευ λγου 아넨 로구) 얻어질 수 있다. 1절에는 로고스(λόγος)가 두 번 사용되는데, 첫 번째 로고스는 기독교 신앙을, 두 번째 로고스는 아내의 변증 또는 전도를 위한 말을 가리킨다. “말없이는 아내가 복음을 말로 전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기독교적 신앙생활이 남편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얻어지게 될 것이다’(κερδηθήσονται 케르데테손타이)는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아내가 남편을 가르치는 행위는 남편과 가정에 수치였다(참고. 딤전 2:11-12).이런 문화에서는 선한 행위가 말보다 더 효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가장 중심의 종교 일치를 강조한 문화에서 남편의 종교를 바꾸는 시도를 하라는 명령은 지극히 위험하고 급진적인 권면이다. 2절에서 베드로는 남편들이 언제 아내의 말이 없이도 그리스도에게 올 수 있는지 설명한다. “그들이 여러분의 존중하고 순수한 행위를 볼 때입니다”(2, 사역). “존중하는으로 번역되는 엔 포보’(ἐν φόβ엔 포보)는 남편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남편을 향한 존중감에 가깝다(참고. 2:18; 3:6).아내가 남편이나 가족의 신들과 다른 신인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숭배하고 기독교 공동체의 친구들과 교제하는 것은 남편에게 사회적 수치였고 도발이었다.남편의 종교와 가문의 전통을 거부한 행위였으므로 남편이 아내의 신앙생활에 분노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현실에서도 남편은 아내의 선한 삶을 보고 신앙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베드로는 순수한 행위”(2)의 예를 3-4절에 제시한다. 3-4절의 권면은 위에서 잠시 검토한 것과 같이 고대 유대 문화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도 좋은 행위로 평가 받은 덕목이다. “머리를 꾸미는 것으로 하지 말고 황금 보석이나 좋은 옷으로 단장하지 마십시오”(3, 사역). 베드로는 내면의 단장을 강조한다. “마음의 숨은 인성을 온유하고 고요한 성령의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단장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소중합니다”(4). 베드로는 대조의 방식으로 아내들에게 이것’(외적인 것)이 아니라 이것’(숨겨진 것)을 행하도록 한다. 문자적 의미인 숨겨진 사람”(ὁ κρυπτς νθρωπος 호 크륍토스 안트로포스)숨은 인성’, ‘진정한 자아’, 즉 내면의 덕을 말한다(참고. 6:3-4; 7:20-22; 고후 4:16). “마음의”(τς καρδίας 테스 카르디아스)는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하는 외모와 대조된다. 참되게 단장한 인성은 온유하고 온화하다(참고. 고전 4:21; 6:1). 온유와 온화는 하나님이 소중하게 보시는 성품일 뿐 아니라 믿지 않는 남편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ἐνπιον τοθεο에노피온 투 테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적합하게 단장하라는 의미다. 베드로가 요청한 순수한 행위는 당시 유대 문화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여성과 아내의 덕으로 평가한 가치에 부합한다. 기독교 신자 아내의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은 믿지 않는 남편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었다(참고. 딤전 2:9). 이는 일부 상류층 부인들에게(참고. 17:12) 지침을 주는 내용일 수 있다.아내의 검소한 옷차림을 보는 남편은 편안한 마음을 가진다.또한 베드로의 권고는 기독교 신자인 아내가 집을 벗어나 교회의 예배에 참여할 때, 특히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가 홀로 예배를 목적으로 집을 나설 경우에 타당한 지침이다.

이어서 베드로는 진정한 자아, 내적인 인성을 단장한 모본을 구약의 여자들에게서 찾는다(5-6). “마찬가지로 이전에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품은 거룩한 여자들은 그들의 남편들의 권위에 순종함으로 스스로 단장했습니다”(5, 사역). “거룩한 여자들”(αἱ ἅγιαι γυνακες 하이 하기아이 귀나이케스)은 그리스도를 믿는 여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참고. 1:7; 고전 1:2; 1:1). 유대 전승에서 대표적인 여성 조상들은 사라, 리브가, 라헬, 레아로 도덕적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기 때문에 거룩한 여성들로 불렸다.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자인 아내들도 거룩한 여성들에 해당한다. 구약의 모범적인 여성들은 베드로의 편지를 받은 성도들처럼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다(참고. 11:13).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에 진정한 자아를 꾸미는 생활의 모본을 보였다. 여기서 소망은 종말을 지향하는 마음을 가리킨다.특히 이 땅에서 고난을 받고 있지만 위협에 굴하지 않고 정의로운 재판관에게 자신을 맡기는 신앙이 바로 소망이다(2:23).

6절에서 베드로는 거룩한 여성을 대표하는 사라의 생애를 남편에 대한 태도로 소개한다. “사라는 아브라함에 순종하고 그를 주로 불렀습니다. 여러분이 선을 행하고 위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그녀의 딸들입니다”(6, 사역). 베드로는 사라의 태도가 1세기의 상황에도 적절하다고 이해한다. 첫째, 언약 백성의 첫 아내인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순종하고 그를 주로 불렀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18:12). 실제로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세 차례나 듣는 장면이 나온다(16:2, 6; 21:12). 사라가 아브라함에 순종했다는 사실은 유대교의 오랜 전통이다. 유대 전승은 남편에게 순종하는 여자를 덕이 있는 여성으로 간주했고 사라를 덕이 있는 여자로 이해했다.예를 들어, 2성전기 구약 위경인 <아브라함의 유언서>에서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로 부르고 그에게 순종한다.예수를 믿지 않는 남편과 사는 아내는 남편을 적대시하거나 가정을 적대적으로 만들지 말고 불의한 상황에서도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둘째, 이교 문화에서 살고 있는 기독교 여성들은 사라처럼 선을 행하고 담대해야 한다. 선을 행하는 것은 칭찬받는 태도를 말한다. 온유와 온화로 남편에게 순종하는 자세도 선행에 해당한다. 선을 행하고 위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사라의 자녀들이다.담대함은 사람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않는 자세를 말한다.특히 <아브라함의 유언서>는 택함 받은 자들의 어머니 사라의 자손은 그녀처럼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한다(A 16:4-6).순종이 굴종은 아니며 위협에 대한 굴복도 아니다. 믿는 여성들의 어머니 사라는 이교 문화에서 두려움에 휩싸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남편을 담대함으로 구한 여성이었다. 사라가 처했던 시대와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들이 처했던 문화가 비슷하다. 남편이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고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도록 위협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이때 신자 아내는 그런 문화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담대히 행한다. 신자 아내가 궁극적으로 순종해야 할 대상은 예수와 하나님이다. 믿는 아내는 남편과 적대적인 주변 환경이 예수와 하나님의 권위를 능가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베드로는 7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남편에게 권면한다. “마찬가지로 남자들은 지식에 따라 여러분의 아내들과 함께 살고 여자를 더 약한 그릇으로 존중하십시오. 그들 역시 여러분과 더불어 생명의 은혜의 공동상속자들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기도가 금지되지 않게 하십시오”(7, 사역). 7절의 호모이오스’(ὁμοως)이처럼’, ‘동일하게’, ‘마찬가지로를 뜻한다. 이 단어는 가장 가깝게는 아내들이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처럼,보다 넓게는 2:17의 명령처럼 행동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남자들은 생활하라

\ 지식에 따라 아내들과

존중하라

\ 여자를 더 약한 그릇으로

첫째, 남편들은 지식에 따라 아내들과 지내야 한다. “지식에 따라”(κατγνσιν 카타 그노신)지식은 하나님이 남편에게 요구하시는 지식이다.지식의 핵심은 하나님 앞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공동 상속자로서 평등하다는 사실이다.아내가 남편을 존중하며 대하듯이 남편도 아내를 존중해야 한다.둘째, 아내를 존중해야 한다. 명사 티메(τιμή, ‘존중’)의 동사형 티메오’(τιμω, ‘존중하다’)2:17에서 황제에 대한 태도에 사용된 용어다.베드로는 황제를 존중하라고 명령할 때 사용한 단어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자세를 위해 사용한다.여자는 신체 면에서 남자보다는 더 약한 그릇이다.여성은 신체 면에서 남성보다 약하고 사회에서 피해를 입기 쉽다. 남편은 아내를 신체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기 쉽다. 남편은 신체가 상대적으로 약한 아내에게 힘을 사용하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가정 폭력).기독교인 남편들은 여성들을 낮게 평가하는 사회에서 신체가 약한 아내들을 향해 존중심을 보여야 한다.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죄 없이 고난을 받았다고 해서 그를 믿는 자들도 폭력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7절에서 남편들의 아내들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아내가 자발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영접했든지 관례에 따라 영접했든지 간에 남편은 아내를 존중해야 한다.셋째, 남편들이 아내들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아내가 생명의 은혜를 평등하게 누리게 될 공동상속자(συγκληρονμος 슁클레로노모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을 함께 상속받는다는 점에서 부부는 평등하다.하나님의 은혜와 약속과 관련해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기 때문에 아래가 아니라 함께’(συγ)를 의미하는 접두어가 사용된다.부부는 하나님 앞에서 아래이지만 상호간은 동등하다.이런 지식은 헬라 문화에서 여자들은 본성과 도덕성과 지성에 있어서 열등한 존재로 여긴 것과 대조된다.넷째,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내를 대하지 않는 남편의 기도를 외면하신다(참고. 5:23; 6:12, 1415; 고전 11:3334; 4:3). 아내를 존중하지 못하는 남편의 기도는 실패다. 약한 자의 편에 서시는 정의의 하나님은 아내를 무시하는 남편의 기도를 무시하신다. 이는 무서운 경고다.

 

IV. 부모와 자녀

 

1. 자녀의 의무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성인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교훈에 해당한다. 신약의 일부 본문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자세를 구약의 가르침과 동일하게 가르친다. 에베소서 6:1-9은 가족 구성원들을 위한 지침을 기록하고 있으며, 1-3절은 자녀, 4절은 부모를 위한 지침이다. 바울은 자녀들에게 부모 공경의 윤리를 가르친다(1-3). 1절의 자녀(ττκνα 타 테크나)는 가정에서 부모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연령대의 자녀를 가리킨다. 자녀들은 주 안에서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이는 주와 그리스도께 하듯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의미다(참고. 5:22; 6:5).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태도를 악한 행위로 평가한다(1:30; 딤후 3:2). 또한 신약 시대에도 자녀는 나이든 부모의 경제적 부양의 책임을 지고 있었다. 예수는 나이든 부모의 필요를 채우는 것을 다섯 번째 계명을 실천하는 것으로 보셨다(7:9-13; 15:6-7). 바울은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답하기를 배우게 하라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4, 8)고 단호히 말했다. 이는 재정 지원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부모나 친척을 돌볼 것을 의미한다.

에베소 5:3에서 바울은 구약과 유대교 전통에 따라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가 지상에서 복을 받게 될 것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부모 공경은 구약의 계명 중에서 약속이 붙은 첫 번째 계명이기 때문이다. 신명기 5:16과 출애굽기 20:12은 각각 부모를 공경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약속한다. 유대 전통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부모에 대한 공경이 나란히 언급되기도 한다.부모 공경과 복의 관계는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일반 원리였다. “아비를 공경하는 사람은 오래 살 것이며네가 역경에 처했을 때 주님께서는 너의 효도를 기억하시겠고 네 죄는 얼음이 햇볕에 녹듯이 스러질 것이다”(집회서 3:4, 6, 공동번역 개정판).

 

2. 부모(또는 어른들)의 의무

 

신약에 흩어져 있는 몇몇 본문을 종합해 보면 부모(와 어른들)의 의무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가정은 자녀의 신앙을 교육하는 학교다. 현대 사회에서 교육은 부모의 중요한 의무에 해당한다. 유대인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정의 부모를 통해 전통을 배웠다(참고. 13:24; 19:18). 요세푸스는 유대 전통의 가장 큰 특징이 자녀 교육이라고 주장했다. 가정에서 자녀는 음식과 안식일 규례를 배울 뿐 아니라 어떤 사람을 동료로 만나고 만나지 말아야 하는지 배웠다. “우리의 주요 관심은 우리의 자녀를 잘 교육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전 생애에서 가장 필요한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주요 관심은 우리에게 주어진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전수된 신앙의 규율을 지키는 것이다”(요세푸스, <아피온에 대한 반박>, 1.60). 요세푸스는 유대인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율법과 조상의 신앙을 배웠다(<아피온에 대한 반박>, 2.204). 요세푸스에 따르면 모세가 세세한 모든 것을 가르치지는 않았으므로 일상의 식사, 친구, 규례를 가정에서 배워야 했다(요세푸스, <아피온에 대한 반박>, 1.173-174). 그러나 구약과 유대 문헌과 달리 신약에는 부모가 자녀를 훈육하는 내용이 별로 없다. 소수의 예(딤전 3:4, 12; 참조. 1:6)에서 디모데는 유대 전통에 따라 가정에서 성경에 근거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와 할머니에게서 거짓이 없는 믿음을 물려받았다(딤후 1:5). 그는 어릴 때부터 성경을 배움으로써 이 믿음을 얻었다(딤후 3:15).

둘째, 어린이는 어른에게 의존해 살아간다. 자녀는 공적인 장소에서 어른들이 보이는 일반적인 태도와 달리 예수는 아이들을 가정(과 사회와 교회)의 소중한 구성원으로 존중하셨다(19:13-15; 10:13-16; 18:15-17).마태복음 19:13-15에서 제자들이 어린이들을 예수에게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은 모습은 어린이에 대한 당시 어른들의 일반적인 태도를 반영한다. 마태는 아이들에 대한 예수의 관심을 여러 곳에 표현한다(14:13-21; 15:21-28, 29-39; 18:3; 21:15-16). 예수는 어린이를 치유하셨고(9:18-26; 15:21-28), 먹이셨고(14:13-21; 15:29-39), 제자들의 모본으로 삼으셨다(18:3). 예수의 관점에서 아이는 부모와 같은 어른들에게 의존해 살아야 하는 존재다.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린 아이들을 볼보는 일은 예수의 마음을 나타내야 할 가족과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다. 의존할 수밖에 없는 어린이는 부담스런 대상이 아니라 어른들은 이런 어린이에게서 신앙의 교훈을 얻어야 한다(18:2-3; 19:4).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서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개념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는 생소했다.

셋째, 가정의 화목은 아버지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는 세례 요한의 사명에 언급된다(1:17).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본문은 당시에 아버지들이 자녀를 가혹하게 훈육하거나 양육의 책임을 수행하지 않은 부정적인 모습을 배경으로 삼는다.자녀에게 돌아와야 하는 아버지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야 한다. 아버지는 자비롭고(6:36; 참고. 15:11-32),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고(11:2, 13), 주는 것을 기뻐하신다(12:30, 32).

넷째, 부모는 자녀가 일정 나이에 이를 때까지 부양할 책임을 다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부모의 마음으로 고린도교회를 위해 일하는 것을 언급하려고 격언을 사용한다.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후 12:14).

다섯째, 부모는 자녀를 존중해야 한다. 에베소서 6:1-3에서 부모에 대한 자녀의 태도를 가르친 바울은 4절에서 자녀에 대한 부모의 올바른 양육 태도를 언급한다. 부모는 자녀를 분노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4절에는 1절의 부모”(γονες 게네이스)가 아니라 아버지들”(οπατέρες 호이 파테레스)이 사용된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헌과 유대 문헌에는 자녀의 훈육이 아버지들에게 있는 것으로 기록된다.”(παροργισμός 파로르기스모스) 또는 분노는 자극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적절하고 신속히 처리하지 않으면 사탄이 악으로 빠지게 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4:26).부모는 자녀에게 수치심을 자극하거나 육체의 고통을 가하거나 조롱하거나 화풀이를 하는 식으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자녀를 훈육하고 그리스도의 길을 가도록 도와야 한다(참고. 4:20-21).주의 교훈과 훈계는 주께서 가르치신 예를 따르고 주의 뜻에 합당한 교훈과 훈계를 말한다.브루스에 따르면 부모가 그리스도의 예를 따르고 그리스도의 교훈을 실행함으로써 바른 길을 보여줄 때 자녀는 부모의 교육을 기꺼이 배우려고 할 것이다.바울은 심지어 부모와 자녀 간에도 상호 존중의 원리를 적용한다.

 

 

V. 형제애

 

신약에는 자녀들 간의 우애를 모본으로 제시하는 본문이 없다. 반면 형제애를 실현하는 모습은 초기 교회에 나타난다. 교회의 형제애는 가족의 형제애를 위한 모본이다. 고대 유대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형제애를 어떻게 이해했고 교회가 이를 어떻게 실현했는지 검토해 보자.

 

1. 고대 유대와 그리스-로마 문헌에 나타난 형제애

 

신약에서 강조하는 형제애는 유대 문화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한 가족의 가치였다. 두 문화에서 형제애의 가치를 기록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형제애는 서로 우애하는 것을 말한다. 구약 위경인 <요셉의 유언>에서 요셉은 자녀에게 자신의 삶을 통해 형제 우애를 가르친다. “그러므로 너희는 서로 사랑하고, 인내로 서로의 결점을 감추어라. 하나님은 형제들의 한마음과 친절한 마음의 동기로 기뻐하신다.내 형제들이 이집트에 왔을 때나는 그들을 꾸짖지 않았고 그들을 위로하고자 했다”(<요셉의 유언> 17:2-3; 참고. 42:25-35). “최고의 덕목 중 하나는 형제애다”(<시므온의 유언> 4:7). 플루타르크(Plutarch, AD 46-119)는 형제애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부모를 위해 형제들은 서로 사랑하고 정서와 행동에서 연합해야 하며, 형제 사랑은 부모를 오래 살게 하는 복이다”(<형제 사랑에 대해> 5). “아버지들은 아들들이 웅변가로 명성을 얻고 부와 관직을 얻는 것보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더 좋아 한다”(<형제 사랑에 대해> 5). 플루타르크는 아버지의 유산을 나눌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전쟁을 선언하거나 분쟁의 시작으로 삼지 말고 우정과 조화의 기회로 삼도록 가르쳤다. “가장 가치 있는 유산은 형제의 우정과 신뢰다”(<형제 사랑에 대해> 11). “유메네스 왕의 어머니는 세 아들이 형을 보호해 주는 형제애 때문에 신들에게 감사했다”(<형제 사랑에 대해> 5).

둘째, 첫째와 연결되는 것으로 형제애는 경쟁보다 조화를 추구한다. 유대교와 그리스-로마에서 가족에서 경쟁은 부적절한 행위였다.서로를 경쟁자로 여기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로를 자신의 명예 밖에 있는 자들, 가족 밖에 있는 자들로 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유대 문헌과 플루타르크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는 세상에서 차지하는 나의 영광스런 지위 때문에 오만하게 그들보다 나를 높이지 않았다. 나는 가장 작은 자 중 하나로 그들과 함께 했다”(<요셉의 유언> 17:8). “같은 뿌리인 한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형제가 다른 형제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날 수는 없다. 운동선수처럼 경쟁하기 보다는 형제보다 더 나은 자질을 갖춰도 형제를 조력자와 조언자로 삼아야 한다”(플루타르크, <형제 사랑에 대해> 13).

셋째, 형제애는 자원을 공유하고 궁핍한 가족을 돕는 행위로 나타난다. 율법에 따라 유산을 분배 받아도(21:15-17; 27:1-22) 상속자들은 형제들의 어려움을 살펴야 했다. 요세푸스는 광야에서 함께 머물며 한 가족처럼 나눔을 실천한 쿰란 공동체를 존중했다(참고. 133:1). “개인의 소유는 공동 재산에 맡겨졌고 모두는 형제들처럼 단일 유산을 누렸다”(Bell. 2.8.3).

 

2. 형제애와 교회

 

유대교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지향한 가족의 이상적인 모습은 신약에서 교회가 보여주는 상호 헌신의 모습이다. 말하자면, 형제애는 바울이 하나님의 가족(‘하나님의 집’-개역개정)으로 부른 교회(딤전 3:15)에서 실천되고 강조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고 가족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신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하나님의 칭호는 아버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이제는 혈통이 아니라 신앙고백에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1:12).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는 방법은 혈통이 아니라 예수의 헌신을 통한 은혜로 된다(, 아브라함의 딸과 아들[13:16; 19:7]). 이처럼 새롭게 정의된 가족에서 형제애를 나누는 것을 예수는 공동체의 본질로 보셨다(13:34; 15:12-13). 베드로는 전형적인 가족의 언어를 사용해 형제애를 강조한다(벧전 2:17).

교회에서 형제애는 평등의 가치로 실현된다. 형제의 개념은 한 아버지 아래서 서로 평등과 결속력을 전달한다. 형제와 자매로 이뤄진 공동체는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는다. 예수는 한 분이신 아버지 아래서 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면서 서로 등등한 가치를 존중하고 한 가족이라는 공동의 가치를 존중할 것을 가르치신다. 예를 들어,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23:8)고 경고하셨다. 예수의 말씀은 형제들 사이에는 권위주의 체계 또는 높고 낮음의 계층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9:11; 10:24-25; 17:24; 26:18; 23:10). 한 분 그리스도를 따르는 평등한 가치를 드높이는 것이 공동체의 정체성이다. 이어서 예수는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 것을 경고하셨다(23:9).

가족 안에서는 경쟁이 허락되지 않고 조화의 가치가 실현돼야 한다는 사실은 신앙 공동체의 모습에 반영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은 하나님의 가족에서는 명예를 위해 경쟁이 용인되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한 예다(5:1-11). 경쟁과 반대되는 것은 동정심과 나눔이다. 그래서 형제애는 필요를 채우고 나눔을 실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 3:8). 이런 형제애는 교회의 본질이다(4:32; 11:29; 13:16; 3; 16:5-6; 22). 예수님을 따르기 때문에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은 헌신하고 나누는 형제애를 통해 교회를 보상으로 얻게 된다(18:29-30). 사도행전의 교회가 조화를 이루고 궁핍함을 해결 받는 모습은 교회가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실현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4:32-34).

 

 

VI. 나가며

 

본 논문에서 우리는 신약의 몇 본문을 중심으로 가족 구성원을 위한 지침을 살펴보았다. 첫째, 공관복음의 치유 사건들은 가족 구성원(, 아들 등)의 회복을 통해 가족을 위로하고 회복하는 예수의 관심과 긍휼을 묘사한다. 예수께서 실현하신 하나님 나라는 가족을 수단과 도구로 삼는 나라가 아니라 가족을 회복하는 나라다. 둘째, 남편과 아내를 위한 규례는 공관복음과 서신서(, 고전 7:3-5; 5:22-25; 3:18-19; 벧전 3:1-7)에 나타나고 하나 됨과 상호 헌신을 부부의 가치로 여긴다. 헌신과 희생으로 표현되는 것이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셨기에 배우자는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하나님이 한 육체로 만들었기 때문에 부부는 하나 됨을 결혼의 규범으로 삼는다. 부부의 종교가 다른 경우 신자 거룩한 삶을 실천하는 아내의 행위가 남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베드로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만 구성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벧전 3:1-7). 부부의 신앙이 달라도 결혼의 본질인 하나 됨과 결속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셋째, 부부는 평등하다. 베드로전서 3:1-7의 권면에 따르면 신체가 약한 아내를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대하는 남편의 기도는 거부된다. 부부는 생명의 은혜를 받는 공동상속자로 평등하다. 넷째, 상호 헌신과 존중의 정신은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에게는 복이 약속되며, 부모는 자녀를 존중하고 양육하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 다섯째, 신약은 형제애를 실천한 가족의 구체적 사례를 제시하기 보다는 형제애를 실현하는 교회의 모습에 관심을 둔다. 가족 언어와 은유는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이상적인 가족의 가치는 교회를 통해 실현된다. 신약은 예수의 희생을 실천하는 교회의 모습을 통해 형제애의 이상을 보여준다. 역설적으로 가족은 교회의 상호 헌신과 존중을 하나님의 가족을 위한 모본으로 삼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상호 헌신과 상호 존중은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적용되는 가족 윤리의 본질이다. 그리스-로마 환경에서 기록된 서신에서 바울과 베드로는 가족의 구성원들이 상호 섬김과 존중의 규범 아래 자신들의 위치(, 남편, 아내, 자녀, )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책임을 다하도록 권면한다(3:12-4:6; 5:21-6:9; 벧전 2:13-3:7; 딤전 2:8-15; 2:2-10).신약에서 묘사하는 가족은 단지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아니라 가족의 회복과 건강함이 하나님 나라 도래와 확장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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