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넌트운동사② 로마제국 박해시대의 렘넌트운동 (1) 네로 황제의 박해

로마제국 박해시대의 렘넌트운동은 제국의 거대한 우상과 맞선 영적전쟁이었다.

2022-04-23 17:07:59  인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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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순교 Martyrdom of St Peter, 1546-50 Fresco 프레스코, 625 x 662 cm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 1564)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열왕기상 1918)

렘넌트운동사 두 번째로 로마제국 박해시대의 렘넌트운동을 연재한다.

주후 313년 이전까지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요인 등 여러 원인으로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그 박해의 종국은 역설적이게도 기독교 공인과 국교화였다. 로마제국이 복음 앞에 무너진 것이었다.

로마제국 박해시대의 렘넌트운동은 로마제국의 거대우상에 맞선 영적전쟁이었고 '남은 자(the remnants)'들은 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들어가는 말

당시 시대상황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엄혹했지만 예수님 공생애 동안 함께했던 12사도와 70인 제자들로 인해 복음은 은밀하게 계속 확산되어갔다이들은 하나님이 남기신 렘넌트(남은자)였으며 이들은 막강한 로마제국의 정치적음모와 우상숭배 강요, 회유에 무릎 꿇지 않고 십자가 구원의 복음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전도하다가 기꺼이 주를 위해 죽음까지 마다하지 않았으며, 가는 곳 마다 로마제국의 우상 앞에 무릎꿇지 않은 무수히 많은 렘넌트 순교자를 남겼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제국의 300여 년간의 황제숭배와 로마의 신- 우상숭배 강요와, 그리스 헬라문화 혼합종교, 미신에 맞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 만인의 유일한 구원자 되심을 선포했다.

이들 대부분이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렘넌트들 이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영적전쟁에서 자신을 온전히 드려 숭고한 신앙유산을 남겼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영적싸움으로 흘릔 피, 곧 순교신앙은 로마제국 박해시대의 렘넌트운동이었다.

300여 년간 로마제국의 잔혹한 박해 가운데서도 오히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늘어났다. 사료에 따르면 초대교회 규모는 주후 40년에 5000여명, 주후 300년에 5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예배는 대부분 가정교회 형태로 이뤄졌는데, 주후 300년쯤엔 가정교회가 65000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로마제국의 박해가 심해질수록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오히려 더욱 공고해졌다. 배교를 강요하는 잔혹 무도한 고문 앞에서 끝까지 오직 예수만을 믿겠노라고 외치고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걷는 순교신앙을 지켰다. 황제숭배를 거부하며 기꺼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모습은 공포와 두려움에 떨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오히려 신앙의 확신과 소망을 주었다.

 

로마제국 당시의 초대교회가 처한 상황을 네 가지로 요약해 보면 첫째, 네로 황제의 박해이후 그리스도인 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사형에 처할 위기에 내몰린 상태에서 안전을 위해 비밀리에 집회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로마제국과 이교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비밀조직체라는 누명을 씌었다.하지만 로마의. 행정장관이었던 플리니우스는 그들에게 (Gaius PliniusSecundus; 23-79) 융통성이 없는 완고함과 황제숭배의 거부를 제외하고는 어떤 악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둘째 로마제국은 판테온(Pantheon) 이른바 '모든 신을 모신 신전 즉 만신전(萬神殿)'을 세우고 이교도 신-우상을 숭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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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테온(Pantheon)

범신론 사상에 젖어 있던 로마인들은, 황제를 신으로 믿지 않고 우상에 절하지 않는 기독인들을 무신론자로 여겼다.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신들의 원수로 여기고 혐오했다. 하지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숭배와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다.

셋째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군대나 관직 근무나 공공업무 종사를 황제숭배로 인해 거부했다. 로마제국은 이를 반제국주의자로 보고 박해를 가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며 일반인 사이의 사회적인 유대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제외하고 세속정부에 충성을 바쳤고 사회적인 깊은 책임감을 보여 주었다.

넷째, 그리스도인들은 인격적 사랑과 높은 도덕성으로 존경을 받았다. 로마제국의 이교도들은 신앙과 도덕이 분리된 반면 그리스도인은 인격적이며 도덕적으로 사회적인 영향력을 주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사회에서 빛을 주는 감화세력이었던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제전이나 의식 참여를 금지했으며, 극장과 원형경기장에서의 경기 및 야수와의 투기 그리고 경마 등 세속적인 쾌락을 금했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영향력을 통한 신앙과 도덕의 혁명은 당시 사회에 새로운 인도주의적 정신을 널리 퍼뜨렸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매춘행위와 노예제를 인간성의 타락으로 보고 비인도적인 행위 근절을 위한 수단으로서 관용과 상호간의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1) 네로 황제의 박해 사도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

로마제국은 초기 예수 신앙 공동체에 관용정책을 폈다. 억압을 했지만, 신앙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정복지 주민들이 믿는 종교에 제국의 안녕과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만민이 신뢰할 만하고 만인을 구원하는 종교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통치자들은 기독인들이 집단적으로 불법을 저지르고 반역행위를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하여 긴장했다.

로마시에는 기독교인들도 많이 살고 있었지만 가장 많은 인구는 역시 유대인이었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로마로 부터 유대인을 추방하려 시도 했으나 그 수효가 너무 많아 혹여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하여 취소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방인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들이 급속하게 증가하여 유대인이 아닌 신자가 로마교회를 주동하게 되었으며, 네로 황제 때에는 그 수효가 엄청나게 증가하게 되어 로마시의 인구를 150~200만 명에 이르게 하는 초유의 국가적 도시로 성장하게 하는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주후 64년 경, 황제 네로는 로마의 대 화재의 방화 죄목을 기독인들에게 뒤집어씌우고 그들을 박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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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718일 로마시에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거대한 불길은 로마제국 수도 거의 대부분에서 6일 동안 밤낮으로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이 화재로 거대한 도시의 절반이 잿더미로 변했다. 수만 명의 로마시민들은 삶의 터전을 몽땅 잃게 되었다. “황제는 친어머니를 죽였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의 어머니인 로마 역시 죽이려 했을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는 또 하나의 로마 화재처럼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황제 자신이 화재를 계획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네로는 자신의 안전에 위험을 느꼈다. 그는 책임을 전가시킬 희생양이 필요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선택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대 로마 신들과 황제 숭배를 거절하여 이미 경멸과 비난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하는 새로운 왕()에 관한 이야기는 반역처럼 들렸고, 또한 그들은 권력도 없었기에 희생양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당시에는 기독교가 일반인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네로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대화재 사건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었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yetibius)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받은 원인을 기술하면서 새롭고 사악한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단체인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표현했고, 타키투스도 기독교를 가리켜 매우 위험한 미신이라고 한 표현에 비추어볼 때 당시 사람들은 기독교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주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사는 두 지역은 불에 타지 않았기 때문에 네로는 기독교인들이 방화범이라고 뒤집어씌워 잔인한 박해를 시작했다.

네로는 화재 발생의 모든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기 위하여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무죄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혹한 고문과 핍박을 가해졌고, 무고한 피가 흘려졌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교인들은 모일 때마다 사도들이 예언한 종말의 때가 왔으며, 적그리스도는 다름 아닌 네로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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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콜로세움; 고대 로마의 경기장으로 사용된 콜로세움. 이곳에서 기독교인들의 박해가 일어나기도 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에게 때로는 짐승의 털가죽을 입혀서 개에게 물려 죽게 했고, 짐승들에게 찢겨 죽게도 했다. 때로는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거나 또는 화형에 처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정원에 나무를 세워 그들을 묶어놓은 후 기름을 발라 화형에 처함으로써 그들이 인간횃불이 되어 정원을 밝히게도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로마제국의 국가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 시기에 네로의 박해로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태복음16:16)로 고백함으로서 기독교적 신관을 확고히 했던 제자였다. 그는 머리가 땅으로, 다리가 위를 향하는 자세로, 즉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는 이렇게 주님과 같은 자세로 죽을 만큼 자신이 고귀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사도 바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숭고한 희생과 말할 수 없는 수고를 치룬 후, 역시 네로의 박해 아래서 순교하였다. 로마 병사들에 의해 바울은 마을 밖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바울은 기도를 마치고 칼에 목이 베여 순교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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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고린도의 시중 에라스도, 마케도니아 사람 아리스다고, 에베소 사람이며 바울에 의해 회심한 이방인 드로비모, 흔히 밧사바로 불리며 보통 70인 중 하나로 생각되는 요셉, 다메섹의 감독 아나니아 등이 박해로 순교했다.

네로의 기독교 박해로 베드로와 바울이 순교하는 등 교회는 큰 지도자를 두 사람을 잃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오히려 복음의 불길을 더욱 타올랐다.

네로 황제의 야만적 행위는 그토록 미워하는 믿음을 없애기는커녕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로 확장시켜 줄 뿐이었다. 오직 예수를 믿는 신앙을 지키려고때문에 아무런 저항 없이 온유한 양처럼 잔인무도한 고통을 감내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대도시를 파괴시킨 폭군과 대조를 이루었다. 그리하여그리스도인들의 파묻은 시체는 오히려 네로에게는 적대감을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독교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네로 황제의 폐위 이후에도 기독교 탄압에 대한 칙령이 철회된 것은 아니었다.

∎ 맺음말  

네로의 사건은 국가 지도자 한 사람이 악한 사단의 손에 잡힐 때 얼마나 무서운 비극을 만들어내는지를 역사는 교훈해 주고 있다.  그리고 소망이 끊어진 듯한 암울한 시대에도 하나님은 남은자(렘넌트)틀 통해 그들이 남긴 신앙유산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시고 있음을 말해준다. 윤광식 기자

 

[연재 렘넌트운동사 남은 자(the remnants) 사상과 렘넌트운동  바로가기: http://kidokilbo.com/news/view.php?wr_id=272&id=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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