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해 봄, 예루살렘의 저녁 공기는 잔인하도록 고요했을 것입니다. 왕의 권력이 군대의 칼날보다 무섭게 한 여인의 일상을 짓밟았던 그날, 밧세바는 이름 대신 ‘우리아의 아내’라는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충성은 왕의 기만 앞에 무력했고, 그녀의 눈물은 거대한 궁궐의 침묵 속에 묻혔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보다 더 철저하게 도구화되고 상처 입은 여인이 또 있을까요.
그러나 놀랍게도 이 비극적인 이름은 세월을 건너뛰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의 계보, 마태복음 1장 6절에 다시 등장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성경은 위대한 성군 다윗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그의 치부를 감추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밧세바라는 본명 대신 굳이 ‘우리아의 아내’라는 고발장을 마주하는 듯한 호칭을 족보 한가운데 박아 넣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서늘하도록 깊은 신학적 통찰과 인간을 향한 절절한 공감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 이 호칭은 인간의 영웅주의를 해체하는 하나님의 엄중한 선언입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추앙하던 다윗 왕도 권력 뒤에 숨은 잔혹한 가해자이자, 구원이 필요한 한낱 죄인일 뿐임을 성경은 날 것 그대로 폭로합니다. 하나님은 영웅의 미화된 승전가가 아니라, 깨어진 인간의 민낯 위에서 당신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둘째, ‘우리아의 아내’라는 기록은 세상이 지우려 했던 약자의 눈물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보상입니다.
권력자 다윗은 햇사람 우리아를 사지로 몰아 철저히 잊히게 만들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 권력에 짓밟힌 이방인 부하의 억울함과 의로움을 메시아의 족보에 영원히 새겨 넣으셨습니다. 세상은 약자를 지우지만, 하나님은 그 이름을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하십니다.
가장 눈물겨운 지점은 이 수치스러운 비극의 자리가 ‘지독한 은혜의 통로’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여인들의 면면을 보면 흠 없는 자들이 없습니다.
시아버지를 속인 다말, 기생 라합, 이방 여인 룻,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까지. 메시아는 거룩하고 깨끗한 온실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과 눈물, 상처로 얼룩진 역사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중에도 저마다의 이유로 본명을 잃어버린 채 ‘상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실패한 아무개”, “상처받은 아무개”라는 주홍글씨를 안고 신음하는 이들에게 ‘우리아의 아내’라는 마태복음의 기록은 거대한 위로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깨어진 과거를 전과(前科)로 삼지 않으시고, 도리어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 은혜의 재료로 바꾸어 가십니다.
가장 깊은 수치의 골짜기에서 메시아의 계보를 이어가신 하나님의 반전은, 오늘날 상처 입은 우리 모두를 향해 여전히 유효한 복음의 초대장입니다./ 발행인 윤광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