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선행 여사
백선행(白善行, 1848~1933) 여사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평생 모은 재산을 교회와 사회에 환원하며 헌신적인 삶을 살며 '평양의 어머니'로 불렸던 분이다.
∎백선행(白善行) 이름의 유래
백선행(白善行) 여사의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이름이 아니다, 그녀의 숭고한 삶의 궤적을 지켜본 대중과 동료 신앙인들이 헌정(獻呈)한 이름이다.
백 여사는 1848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당시의 관습대로 정식 이름 없이 '백 씨(白氏)' 혹은 '백 과부'로 불렸습니다. 14세에 결혼하고 16세에 홀로 된 후에도 평생을 이름 없는 여인으로 살며 오직 노동과 절약에만 전념했다.
그녀가 평생 모은 거액의 재산을 학교와 사회에 아낌없이 내놓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감동하기 시작했습니다. 1920년대 중반, 평양의 시민들과 교계 인사들은 그녀를 더 이상 '백 과부'라 부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즉, 이름은 "백 씨 성을 가진 여인이 평생 선한 행실을 몸소 실천했다"는 의미를 담아 '백선행'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이 지어준 일종의 '명예로운 이름'이 되었다.
이 이름이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진 결정적인 계기는 1928년 평양공회당(현 백선행 기념관)의 낙성이었다. 당시 평양 시민들은 그녀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건물 이름을 아예 '백선행 기념관'으로 명명했다.
또한, 그녀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송덕비)를 세우며 그곳에 '백선행'이라는 이름을 새겼고, 이때부터 본명처럼 사용되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언론과 사회단체들은 그녀를 "이름 그대로 선행의 화신으로 살다 간 분"이라고 추모했다.
백선행 여사는 이름 없이 태어났으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을 스스로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현재까지도 이 이름은 한국 기독교사와 자선 사업 역사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고유명사로 남아 있다.
이제 백선행의 삶의 여정을 살펴보자
∎고난과 시련의 계절 (1848년 ~ 1900년대 초)
백선행은 1848년 평양 명촌에서 가난한 농가의 딸로 태어났다. 1861년 당시 14세 어린나이에 결혼했으나 출산 자녀도 없이 2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되었다.
16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된 그녀는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처절할 정도로 아끼며 돈을 모았다.
삯바느질, 길쌈, 염료 만들기, 음식물 찌꺼기로 돼지 키우기 등 돈이 되는 일은 궂은일을 마다 않고 무엇이든 했다. 그녀는 하루 한 끼만 먹고 거친 옷을 입으며 극한의 절약을 통해 한 푼 두 푼 재산을 모았다.
1880년대 중후반, 그녀의 나이 30중반 무렵 시아버지가 죽자 시아버지를 친부모처럼 극진히 모셨던 백 여사는 남편 사후 약 20여 년간 삯바느질과 길쌈으로 악착같이 모은 전 재산을 시아버지의 장례비와 묫자리(장지) 마련에 쏟아 부었다. 장지로 매입한 곳은 평양 인근 강동군 만달산의 일대의 땅이었다.
하지만 장례를 치르려고 보니 그 땅은 풀도 자라지 않는 거친 돌밭으로 황무지 그 자체였다.
16세에 과부가 되어 20년 넘게 먹지도 입지도 않고 모은 전 재산을 시아버지 장지를 사는 데 썼으나, 그 땅이 쓸모없는 돌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백 여사는 삶의 의욕을 잃고 식음을 전폐하고 대동강 변에서 통곡하며 삶을 포기하려 했다.
∎개종과 신앙의 여정

▴ 산정현교회
그녀가 길가에서 넋을 잃고 울고 있을 때, 당시 평양 시내에서 전도하던 당시 널다리골교회(장대현교회 전신, 후에 산정현교회로 분열) 교인들이 그녀를 발견했다. 교인들은 그녀의 기구한 사연을 듣고 진심으로 위로하며,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이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의지하면 반드시 길이 열릴 것이다"라며 복음을 전했다.
세상의 냉대에 지쳐있던 백 여사는 교인들이 보여준 따뜻한 사랑과 "진실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메시지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신앙을 갖게 된 백 여사는 이후 산정현교회에 정착하여 평생을 헌신했다.
그녀는 교회에 출석하며 "내가 모은 재산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청지기 정신을 확립했다.
산정현교회에서 당시 민족 지도자였던 조만식 장로를 만나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었다. 훗날 그녀가 전 재산을 교육 사업에 기부할 때, 조만식 장로는 가장 든든한 조언자이자 길잡이가 되어주었다고 한다.
∎돌밭이 보물산으로
시아버지 장례를 치른 지 약 20년이 지난 1900년대 초반, 일제치하에서 건축 붐이 일면서 시멘트 수요가 급증했다.
그런데 시아버지를 모신 그 '쓸모없는 돌밭'이 시멘트의 주원료인 석회석 노다지 광산으로 밝혀졌다.
1908년경 일본 오노다 시멘트 회사가 이 땅을 거액에 매입하면서, 장례식 때 사기 당했던 땅이 하루아침에 그녀를 억만장자로 만들어 주었다.
이일로 그녀는 평양의 최고 자산가 반열에 올랐다. 백 여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간증했다.
"그때 교인들이 말한 대로 하나님은 공평하셨다. 내가 사람에게 속아 눈물로 뿌린 씨앗을 하나님께서 보물 산으로 갚아주셨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그녀는 부자가 된 후에도 교만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교회 마당을 쓸고 가난한 교우들을 돌보며 '산정현교회의 백 집사'로 불리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여겼다.
거부가 된 후에도 일요일에는 반드시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백 집사'로서의 직분에 충실했다.
당시 사람들은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신 효심이 하늘을 감동시켜, 버려진 땅을 보물산으로 바꾸었다"고 칭송했다. 백 여사는 이 장례식을 통해 얻은 부를 자신의 사욕을 위해 쓰지 않고, 훗날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데 전액 기부하게 된다.
∎권력의 부당한 강요에 맞서다
1907년~1908년경 평안남도 관찰사 박중양은 일제의 세력을 등에 업고 평양 지역의 공공사업이나 도로 건설 등을 명분으로 지역 자산가들에게 거액의 기부를 강요했다. 특히 과부의 몸으로 벼락부자가 된 백선행 여사를 주된 표적으로 삼아 압박을 가했다.
박중양은 백 여사를 집무실로 불러 고압적인 자세로 기부를 명령했다. 그러나 백 여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단칼에 거절했다.
"내 돈은 내가 땀 흘려 모은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관청의 강요에 의해 낼 수는 없다." "나는 나중에 더 큰 사업(교육 등)을 위해 쓸 계획이 이미 있다." 고 말하자 화가 난 박중양은 그녀를 유치장에 가두고 "돈을 내놓겠다하기 전 까지는 나갈 수 없다"며 심리적, 물리적 압박을 가했다.
당시 백 여사는 60세가 넘은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옥중에서도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가져가려 한다면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며 단식에 가까운 저항을 이어갔다.
평소 그녀를 존경하던 평양 시민들과 기독교계 인사들이 이 소식을 듣고 박중양의 만행을 비판하며 거세게 항의했다.
결국 민심의 악화와 백 여사의 완강한 태도에 손을 든 박중양은 그녀를 아무 조건 없이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놀라운 점은 그 이후의 백 여사의 행보이다.
관청의 강요에는 단 한 푼도 내놓지 않았던 그녀는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의지로 광성학교와 숭현여학교 등에 당시 유치장에서 요구받았던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거액을 흔쾌히 기부했다.
석방 후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 교육 기관에 기부하자, 총독부는 그녀의 완고함과 영향력에 당황하면서도 대중의 눈치를 보느라 더 이상 강압적으로 대하지 못했다.
이 일화는 백선행 여사가 단순히 돈이 많아서 나누는 사람이 아니라, '재물의 주인은 자신과 하나님'이라는 주체적인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증명한다. 권력 앞에서는 당당히 맞서고, 가난한 학생과 민족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베푸는 그녀의 모습에 평양 시민들은 더욱 깊은 존경을 보내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백 여사는 권력의 강요에는 단 한 푼도 내놓지 않았으나, 190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육영 사업과 자선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민족의 미래를 위한 교육 헌신 (1920년대)

▴ 평양신학교
백선행은 민족의 미래가 교육에 있다고 믿고 1922년 평양 광성보통학교에 학교 부지와 건축비로 거액을 기부했다. 1923년에는 창덕보통학교 건축비를 지원하였으며, 1924년 숭현여학교에 전 재산의 상당 부분인 토지 30만 평과 현금을 기부하여 재단법인 설립했다. 1927년에는 지금의 장로회 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평양신학교 재단설립을 위해 거액을 기탁했다. 오늘날 장로교 산실에 크나큰 공로를 한 것이다.
∎사회인프라 구축에도 헌신
백선행은 1925년 대동강 변에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사재를 털어 석조 다리 '백선교(白善橋)' 놓는 등 공공사업에도 앞장섰다.
1928년 조선인들을 위한 문화 공간이 부족하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당시 일본인들의 공회당보다 더 큰 규모의 3층 석조 건물을 지어 기증했다. 이 건물이 평양공회당(백선행기념관)으로 현재도 북한 평양에 남아 있습니다.

▴백선행 기념관
1928년 백 여사가 세운 평양공회당(현 백선행기념관) 건립에도 일제와의 기 싸움이 담겨 있다.
당시 평양에는 일본인들만 주로 사용하는 화려한 건물이 많았다. 백 여사는 "조선 사람들도 당당하게 모일 수 있는 우리만의 건물이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당시 일본인 공회당보다 훨씬 크고 웅장한 3층 석조 건물을 짓도록 하였다.
일제는 이 건물이 조선인들의 민족 결집 장소가 될 것을 우려했으나, 백 여사가 워낙 거액의 사재를 털어 사회에 환원한 인물이라 대놓고 방해하지 못했다.
∎민족의 자존심과 신앙지조를 지킨 백선행
백선행 여사는 단순한 자산가를 넘어 민족적 자존심과 신앙적 지조를 지킨 인물이었다.
1925년경, 백 여사가 학교 설립과 빈민 구제를 위해 전 재산에 가까운 거액을 기부하자,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그녀에게 표창장과 훈장을 수여하려 했다.
당시 총독부는 백 여사의 선행을 이용해 '내선일체'나 일본의 통치를 홍보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이에 백선행은 총독부의 호출을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 동포와 어린 학생들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돈을 쓴 것이지, 일본 총독에게 상을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다." 결국 그녀는 표창을 끝까지 거부했으며, 이는 당시 일제의 압박 속에서 민족의 기개를 보여준 사건이다.
∎청지기 백선행 ‘하나님의 품으로’
백선행은 1933년 86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그녀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한국 여성 최초로 사회장(社會葬)이 거행되었다.

▴장례사진
장례식에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평양 시민이 운집하여 '평양의 어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백선행은 한국 기독교 120주년 기념 '한국 기독교 120인 신앙 위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될 만큼 교계에서도 깊은 존경을 받고 있다.
백선행 여사의 삶은 "하나님께 받은 복을 이웃에게 돌려준다"는 신앙적 원칙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신앙에 기반한 그녀의 무조건적인 나눔은 이념을 넘어 높게 평가받으며, 북한에서도 그녀를 '애국자본가'로 인정하여 기념관과 동상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발행한 백선행 기념우표
백선행 여사는 부의 축적보다 청지기의 삶을 실천한 진정한 신앙인의 표본으로 기억되고 있다.
백선행 여사는 '번 돈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사회와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념을 일생을 통해 증명한 인물이었다. / 글 윤광식 장로(경영학 석사, 경영학겸임교수 역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