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행전(2) 미얀마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 미국 최초의 선교사 아도니람 저드슨

“나는 여기에 십자가를 심을 때까지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

2012-10-24 23:17:51  인쇄하기


영국의 어느 교구 목사관에서 아이들이 “주께서 가라사대 가서 나의 복음을 전파하라”는 찬양을 부르고 있었다.
주일학교 모임이었을까? 아니었다. 네 살 난 어린이가 재빨리 의자에 올라가 엄숙한 표정으로 설교를 했다. 이 아이들은 교회 놀이를 하고 있었고 설교자는 목사의 아들인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이었다.
 
▲뛰어난 학생 그러나 신앙을 잃다
아도니람 저드슨(1788∼1850)은  어릴 때 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비범했다. 세 살 때 벌써 책을 읽을 줄 알았고, 그의 아버지는 어느 날 아도니람이 성경 한 장 전체를 읽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수학 실력은 열 살 때부터 이미 뛰어났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한편, 몇 몇 신학서적도 깊이 연구했다.
  열여섯 살에 그는 미국 명문대 브라운대학교에 입학해 열아홉 살에 과 수석으로 졸업했다. 대학생활 동안 함께 지낸 그의 친한 친구는 재능과 가능성이 있었지만 불신자였다. 그 친구는 기적이나 성경을 믿지 않았다. 그의 영향으로 아도니람 또한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불신자가 되어버렸다. 이 일로 그의 부모님은 깊은 슬픔에 빠지고 말았다. 졸업 후 아도니람은 유명한 극작가가 되고 싶어 뉴욕 연극협회에 가입했다.

  ▲평안 없는 삶
  그러나 젊은 아도니람은 마음에 평안이 없고 삶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연극협회에서의 생활은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 없는 인생의 비참함을 겪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그가 시골 여인숙에 머무르고 있을 때 옆방의 한 남자가 죽음의 위기에 처해 누워있었다. 아도니람은 죽어가는 남자의 신음소리를 밤새 들으며 깨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옆방 남자가 대학 시절 그의 불신자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휩싸였다. 그 잘나가던 친구가 죽음 앞에서 맥없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아도니람은 절망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6주 후 아도니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마음의 안식과 평안을 되찾았다.

  ▲하나님의 소명
  그의 생애에 변화가 찾아온 후 그의 소원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만을 하기를 원했다.
  그가 읽은 책은 그의 생각을 선교 사역의 방향으로 바꿔 놓았다. 그가 유년기에 찬송가로 부르곤 했던 “모든 민족에게 가라”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고, 이제 그의 야망은 선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갈 수 있을까? 그를 선교사로 파송할 미국의 선교단체는 없었다. 아도니람은 기도했다. 그러다 선교 사명을 함께 나눌 다른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었고, 아도니람까지 합한 그들 5명은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응답으로 1810년, 미국선교회가 설립되어 아도니람은 런던선교협회가 미국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지원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그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영국으로 향하던 아도니람의 배는 프랑스군에게 나포를 당했고, 그는 감옥에 수용됐다. 그 와중에도 아도니람은 프랑스어를 몰라 간수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없어 안타까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미국인이 감옥으로 와 미군복 외투로 그를 숨겨 함께 감옥을 걸어 나갔다. 영국에 도착한 그는 런던위원회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과 미국협회가 그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국땅에서
  1812년, 아도니람 저드슨은 앤 해서틴과 결혼했고, 거의 동시에 선교 사역을 위해 인도로 출항했다. 그러나 그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 나라를 정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 인도에서 세력을 장악한 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의 선교 활동에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아도니람의 가족이 4개월의 항해를 마친 후 인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미국으로 바로 되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낙심도 잠시 ‘하나님은 우리를 선교사로 부르시지 않았는가?’ 생각한 그는 인도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버마 랑군에 도착할 때까지 출항하도록 강요당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버마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버마(미얀마)
  그 당시 버마는 절대 권력을 가진 한 왕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국민들은 그의 노예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버마의 국교는 불교였고 매우 잘 조직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버마 국민들은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고, 슬픈 얼굴과 멍에를 진 무거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아도니람과 그의 아내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열심히 언어를 공부했다. 1년 반이 지난 후 부인은 산부인과 진료를 받기 위해 인도로 되돌아갔고, 곧 사내아이가 태어났지만 8개월이 지난 후 그들은 아이를 잃는 슬픔을 당해야만 했다. (다음 호에 계속)
 
헌신과 수고
   아도니람은 만약에 버마인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많은 버마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하루 14시간을 언어공부와 성경을 번역하는 데 쏟았다. 그는 수동 인쇄기로 소책자와 쪽성경을 펴냈다. 새로 부임한 선교사인 휴(Hough)는 인쇄공이었는데 그가 온 후 더 많은 마태복음이 인쇄됐다. 2년 후 어느 날 한 사람이 저드슨을 찾아와 기독교 문학책을 요구했고 저드슨은 5장의 마태복음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저드슨은 장소를 정해 버마어로 사람들에게 설교했고, 밤에는 버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성직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저드슨이 버마에 도착한지 6년 만에 첫 번째 개종자가 나와 세례를 요청했다. 비록 이것이 핍박과 죽음을 의미할지라도 그는 용감하게 결정을 내렸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랑군에 18명의 충성스러운 기독교인이 탄생했다. 저드슨은 설교와 번역을 계속했고 마침내 신약을 끝마쳤다. 이때 새로운 황제의 통치가 시작되어 그는 사역을 계속하기 위한 허가를 받으러 황제를 방문했다.

   감옥에서
   저드슨과 그의 부인이 궁이 있는 애바(Ava)로 갔을 때 그들은 환영을 받지 못했다. 영국과 버마 사이에 전쟁이 터졌고 모든 외국인은 스파이로 간주됐다. 저드슨 또한 체포되어 20개월간 감옥에서 보내게 됐다. 그 감옥은 고문과 더러움으로 아주 잘 알려진 곳이었다. 저드슨은 형구에 채워져 공중에 매달렸다. 그의 머리와 어깨만이 땅에 닿았을 뿐이었다. 족쇄는 살을 찔렀고 사지가 아파왔다. 그에게는 음식과 물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단지 아침 몇 분만 환기와 운동을 위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부인 앤은 날마다 음식과 물을 가져다주었고 매일 저드슨의 석방을 위해 권력층에게 간청했다. 마침내 그들은 저드슨을 감옥 뜰에 있는 단독 막사로 옮겼고 밤마다 앤은 남편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버마 권력자들이 신약 번역본을 없앨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앤은 그 서류들을 베개에 넣어 꿰매어 감옥의 저드슨에게 가져다주었다. 저드슨은 지극한 정성으로 번역본을 보관할 수 있었다.
   그때에 딸이 태어났고 앤은 저드슨에게 보이려고 아기를 감옥으로 데려왔다. 그는 또다시 판자의 틈을 통해서만 공기가 들어오는 내부 감옥으로 옮겨졌다. 시간이 흐른 후에 저드슨과 동료 죄수들은 갑자기 몇 마일 떨어진 마을로 이동됐다. 열병으로 약해진 그들은 피가 나는 발로 먼 거리를 걸어갔다. 앤은 아기와 함께 그를 따라갔고 근처의 창고에서 머무르게 됐다.

   계속되는 시련
   비참한 20개월이 지난 후 마침내 그는 석방됐고 정부를 위해 통역해줄 것을 요청 받았다. 그리고 6주 후 집으로 가는 것이 허락됐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반 아사 상태의 딸을 보살피고 있는 버마 여자와 고열에 시달리고 있는 앤이었다.
   앤이 회복된 후 그들은 애머스트(Amherst)로 옮겼고, 가족을 그곳에 남겨둔 그는 영구 감독관을 돕기 위해 애바로 다시 갔다. 얼마 후 앤이 열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슬픔으로 충격을 받은 지 몇 달이 지난 후 어린 딸 또한 죽었다. 육신이 기진맥진 하여 비탄으로 눌린 채 저드슨은 모든 사람을 피해 얼마 동안 정글의 조그마한 오두막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통해 그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모울메인(Moulmein)으로 옮겨 복음을 전하고 번역을 계속했다. 그리고 교회가 곧 세워졌으며, 1834년 그는 버마어로 된 성경 전권을 번역했고, 1840년에는 개정판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고된 사역은 그를 쇠약하게 만들었고 결핵으로 건강이 위협 받기에 이르렀다.

 ♥ 사역의 완성
 33여년 만에 저드슨은 그의 고향인 미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그는 버마로 되돌아갔고 다시 고국을 보지 못했다. 버마어 사전을 완성한 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됐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시작한 항해 중에 운명, 바다에 수장됐다.
   불타는 열정을 가진 젊은이로서 그는 “나는 여기에 십자가를 심을 때까지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고 외치고 맹세했다. 저드슨은 버마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기 위해 슬픔, 고통, 질병, 핍박을 기꺼이 당했다. 30년 후 63개의 교회와 163명의 선교사와 사역자들, 그리고 7000명 이상의 기독교인이 버마에 탄생했다.
/번역=윤봉기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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