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출처: 서울신문 캡처
매년 2월, 일본 오카야마의 사이다이지(西大寺)는 훈도시 하나에 몸을 맡긴 1만 명의 남성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함성으로 가득찼다. 500년 전통의 ‘사이다이지 에요(西大寺会陽)’는 얼어붙은 추위 속에 알몸으로 던져진 두 개의 나무 막대기, ‘신기(宝木)’를 차지하기 위한 격렬한 사투를 벌인다. 세상은 이를 역동적인 문화유산이라 찬사하지만, 이 축제의 실상은 인간이 가진 근원적 불안과 영적 갈급함의 적나라한 자화상에 가깝다.
첫째, 복(福)의 주권에 대한 착각과 우상화
복이란 창조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은혜의 산물이다. 그러나 사이다이지 에요의 핵심인 ‘신기’ 쟁탈전은 복을 ‘쟁취해야 할 전유물’로 전락시키고 있다. 나무 막대기 하나에 한 해의 운명을 거는 행위는 복의 주권이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완력과 우연에 있다는 인본주의적 기복신앙의 전형이다. 이는 성경이 경계하는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는’ 명백한 우상숭배적 속성을 띠고 있다.
둘째, 고행을 통한 정화라는 허구적 카타르시스.
참가자들은 영하의 날씨에 냉수를 끼얹으며 육체를 학대하는 과정을 통해 영혼이 정화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인간의 죄성(罪性)이 외부적인 고행이나 물리적인 세척으로 씻을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단번의 제사만이 인간을 근본적으로 정결케 할 수 있다. 차가운 물속에서의 정화 의식은 일시적인 심리적 해방감을 줄 수 있을지언정, 영원한 구원과는 거리가 먼 종교적 퍼포먼스에 불과한 것이다.
셋째, ‘성(聖)’과 ‘속(俗)’의 경계가 무너진 무질서
최근 이 축제에서 발생한 인명 사고와 부상자 속출은 이 축제가 지향하는 ‘복’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신의 축복을 갈구하는 현장이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 되고,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지는 승리의 쾌감은 ‘이웃 사랑’과 ‘평화’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진정한 성스러움은 군중의 광기가 아닌, 낮은 곳으로 임하는 겸손과 질서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사이다이지 에요는 복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끝없는 탐욕이 ‘전통’이라는 외피를 입고 분출되는 현장이다. 알몸으로 뒤엉킨 그들의 모습은 사실 구원을 향해 발버둥 치지만 길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인간의 영적 벌거벗음을 상징한다.
이제 우리는 나무 막대기를 쥔 ‘후쿠오토코(복 받은 남자)’의 환호 뒤에 가려진 영적 공허를 직시해야 한다.
진정한 복은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 사랑 앞에 무릎 꿇는 것에서 시작된다./ 윤광식 기자(kidokilbo@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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