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연재➃- 리옹의 가난한 자들 ‘발도파’

최초의 평신도 전도운동을 이단으로 정죄

2017-10-15 22:01:36  인쇄하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시작하기전에 이미 여러사람들이 로마 카톨릭교회의 개혁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 많은 고난과 핍박을 겪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피에르 발도,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사보나롤라 등이다.

 피에르 발도(Pierre Waldo,1140-1205)12세기 프랑스 리옹 출신의 상인이며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따른 인물이다.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고 이들은 리웅의 가난한 자들 혹은 발도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자발적 가난의 삶을 살았던 발도는 당시 교회의 안일과 향락을 비판하면서 신앙인 이라면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러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발도는 성경을 프랑스 방언으로 최초로 번역한 사람이다. 발도는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도, 성직자뿐만 아니라 평신도도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발도파의 기본적인 이념은 기존의 교회 조직체보다는 성경, 복음서를 중시하고, 성경에 따라서 신앙과 도덕을 지키는 것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도덕적인 생활과 청빈을 강조하였다. 

연옥이나 성인 숭배 등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교리, 관습을 부정하였다. 화체설 역시 부정하였다. 가톨릭의 교회 조직 역시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므로 부정적으로 보았고,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따르고자 하지 않았으며 로마 교회를 '바빌론의 창녀'라고 생각했다. 여러모로 개신교, 그중에서도 개혁주의와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토리노의 발도파 예배당

 

이들은 사도와 같이 청빈한 생활을 하였으며 2인 조직으로 각 지로 돌아다니며 설교했다. 말하자면 최초의 평신도 전도운동 이었던 것이다.

결국 1215년 제4차 라테란 교회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어 리옹에서 쫒겨났다.

    ▴이탈리아의 토리노(Torino)는 신앙에 목숨을 걸었던 발도파 본부가 자리한 곳이다. 산골의 작은 도시로, 그 옛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곳 알프스 산자락으로 숨어든 그들이 공동체를 이뤘다. 지금도 그들은 조상들의 신앙 유산을 지키고 있다. 그 깊은 골짜기를 소중히 아우르면서 말이다. 해발 700m 이상에 거주해야 한다는 당국의 명령에 따라, 사람들은 산 위로 올라갔다. 적어도 40도 이상 경사진 곳으로, 거의 농지는 찾아볼 수 없이 척박하다. 저들은 오직 신앙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세상적인 안정과 편안함을 일체 포기해야 했다.

 

왈도파가 내면적으로 위에 언급된 신앙고백의 내용에 부합하고 외형적으로 조직력을 갖추고 활동하던 시기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갱신하고자하는 여러 형태의 운동들이 태동하였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 교회 지도부는 복음을 선포하는 순수한 열정도 이단으로 정죄하기 쉬운 체제를 마련하고 수많은 형태의 박해를 감행하였다. 그래서 왈도파의 신앙적 윤리적 모범성에도 불구하고 박해의 물결은 이들에게 피할 길 없이 강력하게 밀려오게 되었다

1184년 교황의 금지령 이후 스페인에서는 왈도파 척결 칙령이 반포되었고 1187 년에 왈도파를 어디에서든지 체포즉시 화형 할 수 있도록 법이 강화되었다. 1487년에는 교황 이노센트 8세의 칙령을 따르는 크레모나의 감독 알베르토 데 카피타네이(Alberto de' Capitanei)의 지휘 하에 더욱 강력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폭력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왈도파의 가르침은 이탈리아를 넘어서서 독일 스위스 헝가리 폴란드 ,,,, 체코 오스트리아 등 중부유럽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1530년경 왈도파의 중심지는 프랑스 남부 루베론 (Luberon)의 메린돌(Mérindol)이었다. 이곳에서 왈도파 신앙인들은 개혁주의적 신앙을 지키고 농사를 지으면서 삶의 터전을 확대해 나갔으나 이들의 숫적 증가를 견제하기 위하여 1545년 박해가 본격화되었다. 이곳에서의 박해의 잔인성에 대해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 도 우려를 나타냈고 특히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의 보고를 접한 존칼 뱅은 당시 프랑스 왕에게 서신을 보내서 프랑스 안의 개혁적 신앙인들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왈도파에 대한 박해는 이탈리아 남서부 지중해에 접한 지역인 칼라브리아(Kalabria)지역에서도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왈도파는 개혁적 신앙의 내용을 은밀히 서로에게 확산시켰고 무엇보다 이탈리아어로 된 신약 성서번역을 완성하여 1555년 발간하였다. 이러한 성서 번역과 여러 종교개혁 관련 문서와 서적 발간을 주도한 인물은 지오반뤼기 파스칼(Giovan Luigi Paschale)이었다. 군대생활을 통하여 종교 개혁적 성향을 지닌 용병들을 알게 되고 이들에 의하여 종교개혁 사상을 소개받은 그는 칼뱅이 있는 제네바로 가서 그의 지도하에 신학을 공부하였던 인물이었다. 그의활발한 전도 사업을 통하여 왈도파의 내용이 확산되었고 질적 성장을 이루어 나갔으나 마침내 그는 체포되고 1560916일 교수형을 당해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고초를 겪었다

그러한 힘든 상황에서 그가 남긴 서신 가운데 그 일부를 보면 진솔한 신앙인의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여기에 약 80-100명 정도의 사람들이 극도의 배고픔으로 죽어가며 이 가 들끓는 어두운 장소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얻은 모든 것을 내어주더라도 이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 까. 몇몇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만한 힘이 없다고도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도망가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만 그러면 여러분은 ... 바알에게 무릎꿇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영원한 저주로 떨어지게 할 것이므로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제네바로 신앙의 도피처를 삼고 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세상이 주는 모든 유혹보다도 물과 빵을 받고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약간의 물과 빵으로 육체를 연명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영혼은 그렇지 못합니다. 영혼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담긴 진정한 양식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만족하지 못합니다. 복음의 설교 없이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평화 가운데 살고자 하려면 영혼이 안식처를 찾는 곳으로 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좋은 양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평안을 찾고 예수 그리스도의 ., 공동체를 세우면 그것은 원수들에게 모욕을 주는 것입니다.” 

왈도파 지도자의 이 옥중서신은 왈도파들이 박해를 피해 다른 나라로 흩어지지 말고 결집할 것을 호소하며 물질적 양식의 노예가 되어 신앙을 배반하지 않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왈도파에 대한 대표적인 박해의 한가지로 꼽히는 것은 1655년 부활절에 피에몽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의 발단은 1655년 사보이의 공작이 왈도파 사람들이 개종하도록 가톨릭 미사에 참석하던지 아니면 그 지역을 떠나라고 명령하였던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런데 사보이 공작의 기대와는 달리 이들은 추 운 한겨울에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알프스의 험준한 산골짜기 안으로 더 높이 들어가게 되었고 이미 자리를 잡고 그 지역에 살던 왈도파에 합류하였다. 1655424 일 공작은 자신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그 지역 왈도파 사람들을 학살, 강간하고 마을 자체를 파괴하였던 것이 바로 그 역사적 배경이다. 

영국의 대표적 시인인 존 밀턴(John Milton,1608~1674)은 이 사건을 접하고 피에몽의 박해에 대하여 (On the Late Massacre in Piedmont)” 라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영국에서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의 청교도 혁명과 그폭정에 의하여 수 많은 희생자가 나오게 되던 때에 밀턴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이와 유사하게 잔혹한 탄압의 사건에 관심을 보이고 다음과 같이 애도 하였다.

 

오 주여당신의 학살당한 성도들의 원수를 갚아주소서 !

그들의 뼈는 차가운 알프스 산에흩어져 있나이다.

우리의 모든 조상들이 나무와 돌을 숭배하고 있었을 때, 그들은 주님의 진리를 그토록 순결하게 변함없이 지켰나이다.

주님의 책에 주님의 양떼들의 신음을 꼭 기록하여 잊지 마소서.

주님의 양떼들이 피에 주린 피에몽 사람들에 의하여 피 흘리며 죽어가나이다.

아이를 가진 어머니도 바위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돌에 맞아 쓰러지나이다. 그들의 신음소리를 골짜기들은 산으로, 그리고 산들은 하늘로 울려 퍼지게 하나이다.

그 순교자들의 피와 재를 삼중관을 쓴 폭군이 아직도 다스리는 온이탈리아 들판에 뿌리소서. 그리하여 이로부터 백 배의 결실이 맺게 하시고, 주님의 도를 배움으로 일찍 바빌로니아의 재화를 피할 수 있게 하소서.

 

이후 이들에 대한 박해의 강도는 더욱 그 수위가 높아졌고 1685년의 박해 이후에 많은 이탈리아 개신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스위스로 망명하였다. 스위스 사람들은 이들을 받아 주었고 개신교적 신앙을 고백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중에 일부는 1689년에 다시 이 지역으로 돌아와 산속 골짜기 깊이 들어가서 은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이 행동을 영광스런 귀환 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에는 여성과 노인과 아이들도 많이 있었는데 이들은 자기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 뿐 아니라, 개신교적 정신과 신앙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왈도파에 대한 박해는 이탈리아에서 이들에게 종교적 관용과 자유를 허용한 1848년에 이르러서야 종식되었다. 이후로 왈도파는 공식적으로 예전의 모든 언어를 불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바꾸고 이탈리어 전역의 복음화에 힘쓰게 된다. 밀턴이 표현한대로 이들의 순교의 씨앗은 그 후 몇 백배의 결실을 맺고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루어 나아갈 수 있게 한 토대가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탈리아 북부 도시 토리노 방문하고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중세에 종교적 박해를 받았던 개신교 교회를 방문해 용서를 구했다. 사진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발도파 교회에서 오래된 성경에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발도가 당시의 신학과 제도에 순응 했더라면 아마도 그의 삶은 순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경에 기초하여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말하고 행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기꺼이 좁고 험한 길을 걸었다. 그를 따른 발도파도 800년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모진 박해를 받았으나 지금까지 살아남아 세계 각지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을 굳게 지킨 발도야 말로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가장 앞선 선구자라 할 수 있다. /한국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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